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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르르 Brr Apr 27. 2020

잃어버린 인맥찾기


탁상 달력이 약속으로 빼곡합니다.

점심은 밥.

저녁은 술.

주변에 사람이 많고 인맥이 넓어야 성공한대서 정말 그런 줄 알고 치열한 30대를 살았습니다.

마치 나 스스로와 경쟁하듯 매일 늘어나는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 개수를 보면 흐뭇했습니다. 누군가 시간 좀 있는지 물어오면 빽빽한 달력을 들먹이는 재미가 있고, 나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는 믿음에 즐거웠습니다.

 

해를 거듭하던 어느 날 문득, 폰을 열어보니 저장만 했을 뿐 한 번도 연락하지 않고 지낸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명함 뭉치를 책상에 깔아놓고 (지금이야 어플이 있지만) 명함첩에 하나씩 꽂던 지난날을 돌이키며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의 번호에 인맥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제가 우스웠습니다. 어떤 사람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어떻게 시간을 쌓아가라 듣고 흘리기만 했지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맥만 쌓아두면 그들이 알아서 두꺼운 매트리스가 되어 나를 편히 살게 해 줄 거라 믿었던 나. 만나니까 저장하고, 저장했으니 또 하나의 인맥을 넓혔다 믿었던, 그런 나였습니다.

 

번호는 많아도 통화 버튼 하나 선뜻 누르지 못하고, 카톡을 열어 스크롤바를 올려도, 누구에게 안부 한 번 쉽게 묻지 못하는 이유였습니다. 수 십, 수 백 명이 눈 앞에서 웃고 있지만 내 속을 열어 이야기를 털고 싶은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지워도 내 삶이 크게 나빠질 것 같지 않지만, 그들이 '언젠가' 내 삶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차마 놓지 못합니다. 그 '언젠가'라는 게 그때 가서 유효 할런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사람이 많다 자부했던 부심의 무기력을 발견하는 즉시 마음 한편이 공허합니다. 언제나 나를 지지해줄 것 같던 단단한 몇 사람마저 내 기대를 버리면 공허는 이내 외로움으로 변해 꾸물거리죠. 그것은 일시적이며 잠시 스치는 감정이라 우겨보지만 집요하게 따라붙습니다. 얼마 없는 인맥보다 풍성한 인맥이 주는 외로움의 골은 더 깊고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는 얄팍한 핑계 한 줄기를 잡아 흔들어 봅니다.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려 했던 지난날의 과도한 욕심이 스칩니다. 식사를 함께한 기쁨보다 돌아서면 내가 한 말과 행동에 무슨 문제가 없었을까 분석하느라 배가 부른지 고픈지 잊었습니다. 관계란 농익게 영글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고, 그저 번호 하나 딴 것으로 내 사람인 양 혼자 든든했던 착각이 날 비웃습니다. 돈독함이란 '언제 한 번 보자', '언제 한 번 밥 먹자'로 애매한 미래를 기약할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정성이라는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정성은 술 사고 밥 사고 커피 사는 일이 아닌 그들에게 필요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업무에 도움을 주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안부를 묻고, 때론 답답한 마음을 들어주고, 기쁜 일에 박수 보내며 슬픈 일에 달려가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그렇게 쌓인 에너지가 어느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환산할 수 없는 가치로 변할 때, 진짜 나의 인맥이 된다는 것. 좀 덜 피곤하고 좀 덜 손해보는 적당한 마지노선의 관계가 적당한 인맥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전화번호 저장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보겠다는 다짐 정도가 되겠습니다.
 

알고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설마.

프로필 사진에 얼굴을 올리고 (어쩌면 번호가 달라 다른 사람일지 모를) 인맥들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르륵 톡을 날렸습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1' 과 '누구세요?'


나의 전화기에 저장된 묵은 번호는 가짜 인맥이었습니다. 간헐적으로 도착한 '이게 누구야!'라는 답이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번호가 바뀌고, 차단이 될 때까지 주고받은 상호 간의 정성은 없었으니 나도 상대도 서로를 잃었습니다. '언젠가' 도움이 될 거란 '쓸모'의 가치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더 강렬히 있었다면 인맥은 숨을 쉬었을지 모르지만 그조차 없었다는 것은 그저 '서로 아쉽지 않은' 나그네입니다.

거품을 쪼옥 뺀 전화번호들.

그 수가 여전히 세 자리여서 다행이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에 설렘을 더합니다. 그들에게만큼은 정성이라는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선택과 집중을 통해 여과된 찐 인맥일 수 있다는 잠재된 가능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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